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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준♡기타

[작문] 새벽의 블로그 - Love sick.

by lovely-namjoon 2024. 10. 22.

글을 읽으며 음성 지원이 될 때가 있지. 그게 반복되자 꼭 그 애가 내 곁에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어.

새벽에 블로그 쓰는 습관을 고쳐야지 하면서도 계속 새벽에 휴대폰을 붙잡고 몇 시간이고 블로그에 글을 썼다. 마음이 허한 느낌, 심장 위쪽이 간질거리고 목구멍이 따끔거리며 뭔가 치밀어 오르는 느낌. 몇 시간이고 낯선 골목길들을 헤매다 돌아와, 지쳐 잠들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던 밤들.
꿈꿔 본 적이야 있었지만 생각해 본 적은 없었던 외국 생활. 내 삶의 교통 사고 같은, 당시의 나로서는 피할 수 없었던 고통들. 내장이 덜덜 떨리는 것만 같은 두려움과 눈물의 날들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택한 선택지였다. 다른 선택지는 뭐가 있었을까. 몇 가지를 시도해 보았으나 나는 불안과 공포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결국 택한 건 다른 나라로 가는 거였다.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했었다. 다른 최선이 있었을지도 모르겠으나.
  일본을 선택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내가 일본어 기초는 알고 있었다는 것과 기초 문법을 알면 단어만 외우면 어느 정도 말을 할 수 있는 언어가 일본어이기에 말을 금방 배울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 무슨 일이 생기면 몇 시간 만에 한국에 갈 수 있는 가까운 거리, 쌀밥을 먹는, 식습관이 크게 다르지 않은 나라, 내가 가진 돈으로 갈 수 있는 나라.
사실 가장 큰 이유는 돈이었다.
일본 문화에 관심도 많았었고 여행도 여러 번 왔었지만 일본 문화에 경도돼 있던 수준은 아니어서인지 나는 사는 내내 향수병에 시달렸다. 친구를 사귀어 보려고도 했지만 잘 되지 않았고 한국어 배우고 싶다던 남자들은 추파를 던졌다.
무엇보다도, 내가 이민을 원해서 온 게 아니라, 도망치고 싶어서, 어디론가 가야만 한다고 느껴서 왔다는 것이 날 힘들게 했다. 내가 멀쩡하게 잘 살아갈 수 있는 인간이었다면 여기에 오지 않았을 텐데 하는 생각에 사로잡혀 늘 괴로웠고 내가 실패한 인간이라는 생각에 짓눌려 있었다.
오기 전에 일본어 공부보다도 일본 문화에 대한 공부를 많이 했고 일본 와서는 새벽 네다섯 시에 일어나 밤 아홉 시쯤까지 밥 먹는 시간 빼고는 내내 공부를 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일본어 공부를 열심히 했다. 그 덕에 일본어를 왜 이렇게 잘하냐는 말을 수도 없이 들었지만, 먹고살려고요 웃으며 대답하는 심정이 늘 약간 쓰라렸다. 난 정말 살아 있으려고 여기에 왔고 여기서 살아가기 위해 공부한 것뿐이니까.
단지 살아 있기 위해서, 봄이 네 번 지나가는 동안 버텼다. 네 번째의 겨울, 난 더 이상 견디지 못 했지만.
난 즐기기도 즐겼다. 화려한 도쿄에서의 소박한 생활을. 나쓰메 소세키와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 이상의 수필에 쓰여진 거리들을 나도 지나가 보았다. 꼭 그 동네 사는 사람처럼 몇 동네를 산책하듯 걸으며.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에 나오는 야구장에 가서 무라카미 하루키처럼 외야에서 야구를 보며 무라카미 하루키와 같은 팀을 응원하고 무라카미라는 성의 선수를 응원했다. 내가 좋아하는 패션 브랜드의 하라주쿠 본점에서 옷을 사고 그 옷을 입고 하라주쿠를 돌아다녔다. 한국에서 그랬던 것처럼 도쿄의 단관 영화관에서 왕가위 특별전을 보았다. 몇 번째 보는 건지 기억 나질 않는 중경삼림과 아비정전을 보며 나도 사랑에 빠지고 싶다고 생각했다. 나는 내가 기괴하게 망가지기 전의 한국에서의 내 삶을 도쿄에서 이어갔고, 내가 도쿄에 머무르게 된다면 해 보고 싶었던 것들을 대부분 해 보았다.
남들은 내게 어쩜 그렇게 적응력이 좋냐고도 했다. 겉보기에는 그래 보였을지도 모른다. 난 싸돌아다니는 걸 좋아하는 인간이고 그러다 보면 거리를 알게 된다. 거리를 알게 되면 마치 토박이인 것마냥, 남들이 보기에도 그렇고 스스로 느끼기에도, 무척 오래도록 여기에 살고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렇지만, 낯설지 않은 거리가 늘 낯설게 느껴졌다.
삼년 남짓한 시간 동안 도쿄에서만 이사를 다섯 번 했다. 회사도 몇 번을 옮겼다.
이제는 옮기지 말아야지 하고서 쉐어하우스가 아니라 일본 부동산에 가서 소개 받은 월셋방은 지은 지 50년 정도 된 낡은 2층짜리 복도식 아파트였다. 방에는 에어컨과 벽장, 전등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그 방에 공짜로 얻은 침대, 탁자, 의자와 상자 몇 개, 야마하 키보드를 들였다.
전철이 다니는 선로를 따라 출퇴근을 했다. 철길 바로 앞에 자리한 집은 전철이 지나갈 때마다 흔들렸다. 회사 사장님께서 혹시 침대 필요하면 안 쓰는 거 하나 주겠다고 하셨으나 필요 없다 했었던 나는 오 분 십 분 간격으로 흔들리는 바닥에서 잠을 잘 수가 없어 침대를 받아 올 수밖에 없었다.
회사 업무는 단순했으나 할 게 많았다. 입사 때 들었던 업무와는 다른 업무들이 내 주 업무가 되었다. 말 그대로 쉴 새 없이 일하고 나서 집에 오면 흔들리는 전철에 집도 같이 흔들리고, 전철이 뜸해지며 이제 좀 쉬겠다 싶으면 컴컴하고 적적한 방 안에서 마음이 허해져 휴대폰을 손에서 놓지를 못 했다.
그냥 이런저런 글을 썼다. 막 썼다.
한국 뉴스도 많이 봤다. 뉴스에 대해서도 많이 썼다. 어떻게 사람이 죽었는데 사회의 반응이 이럴 수가 있냐 분개하기도 하고 사라져 가는 옛것들을 아쉬워하기도 했다.
내가 좋아하는 그 애에 대해서도 많이 썼다. 무척, 무척 많이 썼다. 사랑을 담아서, 혼자서.
중고등학생 때 아이돌에 빠져서 학교를 빠지기도 했고 1박 2일로 서울에 다녀왔다가 엄마에게 무지막지하게 혼나기도 했다. 나중에 생각하니 그 시간들이 아까웠다. 내 청소년기를 다 날려 먹은 것만 같았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었다고 생각했다. 난 무척이나 우울했었고, 순수한 눈빛을 지녔다 느낀 그 오라버니를 무척 많이 좋아했으니까. 아르바이트 시급 천 몇 백 원을 모으고 모아 CD도 사고 사진도 사고 서울에도 가고 부산에도 가고, 새벽부터 기다려 그 오라버니랑 악수도 하고. 내 청소년기의 즐거웠던 기억이란 그 소년으로 인한 게 대부분이었으니까.
그러나, 후회도 무척이나 많이 했었다. 연예인을 좋아해서 남는 게 없다 생각했다. 이제는 아이돌을 좋아하지 않으리라 생각했고, 관심도 없었다. 텔레비전을 거의 안 보니 누가 누구인지도 몰랐다. 일본에 오기 전까지는.
일본에 와서 첫 해에는 한인 타운에 갈 수가 없었다. 아르바이트한 돈으로는 그냥 정말 생활만 했다. 밥값, 차비, 전기세 등 뭐든 아껴야만 했고 일본어 학교 기숙사에서 여름에 에어컨을 켜지 않고 방문을 열고 생활하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불도 안 켜고 에어컨도 안 켜고 컴컴한 방 안에서 나온 지 10년 돼서 작동이 될지 안 될지 보증이 안 된다며 싸게 팔길래 사 온 중고 노트북으로 내가 좋아하는 문학 작품을 번역하거나 라디오를 듣거나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한인 타운에는 한국어 강사 아르바이트 면접, 단기 아르바이트 때문에 두어 번 간 게 전부였다. 같은 도쿄인데도, 거기까지 놀러갈 돈이 없었다. 차비를 아끼려고 편도 한 시간 거리는 기본이고 두 시간 정도 거리도 걸어다니던 시절이었으니까.
일 년이 지나 일본어 학교를 졸업하고 간신히 취업을 했다. 취업을 하고 첫 월급을 받았을 때였나 취업이 되었을 때였나 같이 일하던 아이가 치킨을 먹으러 가자고 해서 신오오쿠보에 갔다. 치킨을 먹으러 간 게, 일 년 넘게 살면서 두 번째였다. 치킨, 그게 뭐라고.
그렇게 신오오쿠보에 발을 디뎠다. 케이팝 아이돌 천국인 그곳에.
아이돌들을 봐도 누가 누군지를 몰랐다. 사진으로만 봐서는 예전에 좋아했던 오라버니들보다 별로라고 생각했다. 그런 채로 지냈다. 밥을 먹으러 가든 화장품을 사러 가든 그냥 거리를 걷든 사방팔방에서 들려오는 한국 댄스 음악들을 들으면서도 누구 노래인지를 몰랐다. 그랬었다.
그냥 그러다, 한 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여러 가지가 겹쳤던 것 같다. 정확히 어디서 알게 됐고 어떤 면을 좋아하게 됐는지도 모르는 채 그냥 어느 날 보니 빠져 있었다. 어쩌다 보니 SNS 계정을 팔로우하고 있었고 신오오쿠보의 케이팝 아이돌 굿즈 판매점 앞의 등신대 배너를 보면 가슴이 두근거렸다.
어느 날 보니 블로그에 그 아이 이름을 쓰고 있었다. 내 사는 이야기를 쓰다 보니 자연스레 내가 좋아하는 그 아이 이름도 쓰게 된 것이었다. 아무런 목적도 없었다. 그냥 썼다.
검색 유입 보는 걸 좋아한다. 이 세상 저 너머 누군가가 내가 타이핑한 단어를 똑같이 타이핑한다는 것이, 그 단어에 관련된 이야기에 관심이 있다는 것이, 그래서 내가 모르는 어떤 곳에서 내가 쓴 글을 읽게 된다는 것이, 난 지금도 신비하게 느껴진다.
검색 유입에 그 아이 실명이 있었다. 정말 사사로운 생각을 쓰는 블로그인데, 팬들이 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명 석 자는 쓰면 안 되겠구나 싶어 애칭까지는 아니고 그냥 이름을 사사로이 부르는 느낌으로 쓰기 시작했다. 그 애가 왠지 더 친밀하게 느껴졌다.
어느 날, 덧글이 달렸다. 또 광고구나 생각했다. 블로그를 하도 없애 버릇하여 지금은 그냥 망한 블로그에 일기를 끄적거리는 수준으로 블로그를 하고 있지만 전에는 일 방문자가 700~800명 되던 블로그도 있었다. 광고 덧글이 많이 달렸었다. 요즘처럼 개인이 다는 광고 덧글이 아니라 블로그 글 작성 시 얼마 드립니다 블로그 삽니다 하는 등의 광고 덧글이었다. 블로그에 소설 및 영화 감상문을 정말 정성 들여 썼었고, 내가 읽은 책의 작가님께서 덧글을 달아 주시기도 하고, 내가 좋아하는 야구 선수, 그래서 그림도 그리고 야구장에 플래카드 만들어 응원도 간 야구 선수 분이 덧글을 달아 주시기도 했다. 그런 블로그도 있었다. 나의 지독한 우울, 주기적으로 찾아 왔던 자살 충동, 겁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고 가족들도 사랑하고, 나는 실제로 죽을 수는 없는 인간이지만 사회적으로만이라도 나를 매장시키고 싶다는 충동에 블로그를 탈퇴하고 휴대폰 번호를 해지하고 회사를 관두고 뭐 그러곤 했었다. 그래서 블로그들이 다 없어졌다. 그러나 나는, 블로그를 하고 싶다는 충동을 억누르지를 못 했다. 내가 갖고 있는 생각, 사소한 이야기들, 주변에는 얘기할 수 없는,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이 주변에는 없는, 그러나 그냥 떠들고 싶은 그런 내 사소한 이야기들, 그리고 누군가가 언젠가는 읽어 줄지도 모르는 그런 이야기들을 쓸 수 있는 곳이 블로그뿐이니까.
사사로이 그 애 이름을 부르며 블로그에 그 애 얘기를 썼다. 그 애가 나온 기사에 대해, 그 애가 나온 영상에 대해, 그 애가 쓴 글, 그 애가 나온 사진, 그 애가 찍은 사진, 그 애가 간 곳, 그 애가 입은 옷, 그 애가 읽은 책, 그 애가 듣는 음악, 그 애가 만든 음악, 그 애가 부른 노래, 그냥 내가 알 수 있는 그 애의 모든 것에 대해. 그 애를 생각하는 내 마음에 대해.
그 애에 대해 쓴 것뿐인데 덧글이 달리곤 했다.
항상 잘 보고 있습니다.
또 광고겠거니, 신경쓰지 않았다. 그런데 계속 덧글이 달렸다. 항상 잘 보고 있습니다.
"항상 잘 보고 있습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
마치 그 애가 써 준 것처럼 느껴졌다.
그 애가 내 글을 읽는 것처럼 느껴졌다. 저 먼 곳에서 나를 찾아 와 준 것처럼 느껴졌다.
내 마음을 받아 준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상사병에 걸렸다.
. . .
내 머리가 만들어 내는 그 애 목소리를 따라 골목을 헤맸다. 예전에는 허한 마음을 움켜쥐고 다리가 아파 못 걷겠다 싶을 때까지 그냥 울면서 걸었던 길들이었다. 그 애 노래를 들으며 걸었다. 어느 날은 정말로 그 애가 말을 걸어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슬퍼하지 말아요... 그 애가 공유한 노래가 날 위한 노래처럼 느껴졌다. 세상에 슬퍼하고 있는 사람이 그 순간에만도 수도 없이 많았을 텐데. 날 위한 노래가 아닌데 날 위한 노래처럼 느껴지네 생각했다.
그 애랑 같이 사는 꿈을 꿨다. 머릿속에 그 애 생각밖에 없었다.
한국으로 돌아가야겠다 생각했다. 한국으로 가도 그 애를 만날 수는 없다 생각했다.
이중적인 생각을 반복했다.
다 때려치우고 한국으로 돌아갔다. 그 애를 좋아하는데, 만날 수가 없는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머릿속에서 퓨즈가 터졌다.
동생에게, 내가 좋아하는 그 애랑 결혼하는 꿈을 꾼다고, 그런 생각이 든다고, 그런 소리가 들린다고 말했다. 생각이 너무 커서 소리가 들린 것뿐이었는데. 그 애 목소리를 하도 들어서 음성 지원이 된 것뿐이었는데.
밥도 안 먹고 물도 안 마시고 잠도 안 자고 그 애 생각만 하며 울다가 쓰러졌다. 잠을 안 자니 깨 있어도 꿈 속에 있었다. 그러다 쓰러져서 잠을 잤다. 그러다 깨서는 또 꿈 속에 있었다.
몇 달간, 꿈 속에 있었다.
그 애를 좋아하는데, 영영 만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어차피 말아 먹은 내 인생, 짓눌리고 망가진 나. 남들이 보기에는 이런저런 일 있었어도 그냥 밝게 잘 살고 있고 일본 가서 열심히 하고 좋아하는 거 하면서 지내는 것처럼 보였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너는 적응력이 참 좋아, 어디 가서든 너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지내잖아. 좋아하는 것도 못 하고 살면 너무 힘드니까. 난 좋아하는 게 무척 많고.
죽고 싶었다.
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꿈 속에서 도로를 질주했다. 꿈을 꾸며 뛰어다니고 소리를 질렀다.
버스에는 치이지 않았고 나는 무사히 고시원으로 돌아와 쓰러져 잤다. 다음날 또 꿈 속에 있는 채로 뛰어다녔다. 아무것도 먹지 않고 마시지도 않고 제대로 자지도 않고.
그렇게 며칠이 흘렀는지 모른다.
온몸의 신경이 파직파직 터지는 느낌이 들었고 눈을 감고 있으면 불빛들이 펑펑 터졌다. 팔다리가 멋대로 움직였고 세포들이 팡팡 터지는 느낌이 들었다. 고시원에서 어디론가 뛰쳐나가려다 문 앞에서 쓰러졌다. 지나가던 사람이 구급차 불러 드릴까요 말을 걸어 왔으나 괜찮다 하고 간신히 일어나 맨발로 나가서는 거리를 배회하다 기억이 끊겼다.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다가 그럴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먹을 수도 없고 마실 수도 없게 되었다.
자꾸자꾸 끊어졌다. 몸 속의 신경들도, 머릿속의 기억들도.
어느 날 밤 또 길가에서 쓰러져 잠들었고 경찰 분이 오셔서 제대로 걷지도 못 하는 날 부축해 경찰차에 태워 경찰서로 데리고 갔다. 힘이 없어 소파에서 자꾸 미끄러져 내렸다. 고모가 와서 날 데리고 갔다. 고모가 편의점에 가서 마실 것도 사 주시고 고모 집에 가서 같이 잤다. 얘기도 했는데 기억이 나질 않는다. 나는 계속 꿈 속에 있었고 고모가 무서웠다. 새벽에 탈출했고 어떻게 알았는지 경찰서 쪽으로 달려갔다. 몸에 힘이 없으니 자꾸만 쓰러졌고 쓰러진 채로 친하지도 않은 사촌 동생 이름을 부르며 욕을 했다. 악몽을 꾸면 모르는 사람 아는 사람 다 나와서 싸우고 욕을 하고 하는 경우도 있듯, 깨 있는 채로 악몽을 내뱉었다. 그러다 또 실려 갔다.
어디로 가는 걸까, 차 안에 쓰러져 누워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채 잠들었다 깼다 했다.
병원 한 군데에 들러 소변 검사를 하고 잠깐 누워 있다가 밥을 먹고서 집으로 왔다. 내가 떠나갔었던, 그럴 수밖에 없었던, 우리 집.
그런 나날이었다.
네 번째 겨울을 못 넘기고 돌아온 한국에서 나는 이런 꼬라지였다.
방에서도 안 먹고 안 자다가 쓰러져 있는 날 엄마가 돌봐 주었고, 그러다 정신이 들었나 싶었는데, 정신과 약을 먹으면 멍해져서 잠들곤 했고 잠에서 깨면 기억이 사라져 있곤 했다. 내 악몽은 조현병이 아니라 상사병이었는데, 조현병 약을 먹는다고 나을 리 없었다. 나는 그 애 생각만 하고 그 애 이름만 부르면서도 현실을 알고 있었다. 다가갈 수 없고 다가가서도 안 된다는 걸.
그냥 죽고 싶었었다.
그러다 정신병원에 입원당했다. 뭔가 동의서를 쓰라길래 부모님이랑 같이 갔으니까 그냥 썼다. 의사가 있는 방에 가 환청이 들리는 것 같다 했더니 뭐라고 하길래 의사만 권위 있고 나는 권위 없냐고 했더니 의사가 날 끌고 가라고 하여 끌려갔다. 정말 무서웠다. 팔에 멍이 들었다. 살려 달라고 소리를 질렀더니 날 침대에 억지로 묶었고 주사를 놨다. 난 기절했다.
삼 주 가량 그 병원에 입원당해 있었다.
입원당하자마자 난 정신을 차려야 하며 차릴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 병원에 있기 싫었기 때문이다. 환청이 들리는 게 아니라 내가 망상에서 벗어날 생각이 없고 그건 이렇게 사느니 그냥 죽고 싶다는 생각뿐이어서 그렇다는 걸 알았다.
정신병원에는 정말 정신이 나간 사람들도 있었고 가족과의 불화로 입원당해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어쨌든 그 사람들과 함께 있으며, 나는 미친 게 아니라, 아니, 미치긴 미쳤었는데, 스트레스가 너무 심했고 향수병에 상사병에 내가 정말 한계에 다다라서 그렇게 됐었구나 하는 걸 깨달았다. 그러나 내보내 달라 해도 먹히질 않았다. 그곳의 의사 및 간호사들에게 난 미친 사람이었고, 그 사람들에게 내 말은 미친 소리였으니까.
엄마와 동생에게 번갈아 가며 전화해 내보내 달라고 울고 악을 쓰고, 악을 쓸수록 간호사들은 날 미친 사람 취급하고, 그런 나날들이었다. 약 먹고 자고 약 먹고 자고. 잠을 안 자면 신문을 좀 보다가 옆 방 환우 분과 병원 복도를 몇 번이고 왕복하다가 밥 먹는 시간이 되면 밥을 먹고 밥 먹고 담배 피우는 시간이 되면 옥상에 올라가 다 같이 담배를 피우고. 내가 담배 피우는 게 내가 미친 증거라고 생각한 우리 엄마가, 우리 딸은 제정신으로는 담배 피울 애가 아니라며 담배는 끊었냐고 물어 본다는 병원 직원 분의 말에 그냥 햇볕 쬐러 가고 싶어서 피우는 거라 말하고 담배는 끊었지만. 담배를 피우지 않으면 바깥 공기를 쐴 수가 없는 곳이었다. 다 같이 담배를 피우는 시간에만 옥상에 올라갈 수 있었으니까. 나는 옥상 난간 쪽으로 가 한참을 바깥을 바라보곤 했었다. 따스하면서도 서늘한 햇볕을 쬐면서.
가족과의 불화로 장기간 입원당해 있는 분께서, 의사 간호사들에게 말해 봐야 소용 없고 가족이 와서 꺼내 달라 해야 내보내 준다는 말씀을 하셨다. 나는 엄마와 동생에게 전화를 하다 지쳐서 안 하기도 했었는데, 그 분 얘기를 전하면서 또 전화를 했다. 그러다 병원 외부인 같은 상담사 분이 오셨고 내 상태에 대해 몇 가지를 물어 보시고는 노래 치료를 하는데 참가해 볼래요 하시길래 내가 머뭇거리자 왜 그러냐 하셔서, 어차피 지금 나 정신병원에 있는데 내가 못 할 말이 뭐야 하는 마음에 노래를 하면 사람들이 잘한다고 난리가 나서 잘 안 부른다고 그랬더니 약간 당황스러워 하셨는데, 어쨌든 그러고 이틀 뒤쯤 노래 치료에서 난 노래를 불렀고, 노래를 어쩜 그렇게 잘하냐는 말을 들었고, 노래를 부른 덕인지는 모르겠지만 이틀 뒤인지 사흘 뒤인지에 엄마가 와서 날 데려갔다. 엄마가 그렇게 따스한 존재라는 걸 이 시기에 정말 온몸으로 느꼈다. 퇴원하는 날 햇살이 무척 좋았고, 산동네에 있는 그 병원, 산길에 있는 도로, 버스를 타고 가기에는 너무 멀어서 택시를 탔는데 택시 안으로 쏟아지던 햇살, 부스럭거리던 내 옷가지가 들어 있던 까만 비닐 봉지.
사실 노래를 박자 맞춰 부르기가 무척 힘들었었다. 정신병원에서 주는 약을 먹으면 신경이 둔해졌는데 정신이 멍해져서 잠이 쏟아지는 것 외에도 근육이 약간 마비되는 듯한 느낌이 들었고 입술 및 혀를 움직이는 게 마음대로 되지 않아서 말하는 게 느려지고 발음이 약간 샜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대로 말을 하려면 무척이나 힘을 기울여야 했고, 노래를 부를 때도 온 힘을 다 쏟아서 노래를 했다.
퇴원 후에도 두세 달 정도 신경정신과에 다녔다. 가족들이 걱정 안 하게 하기 위해서 다닌 거였다. 우울해서 눈물이 나고 죽고 싶다는 마음이 든다고 하면 내가 이 짧은 말을 다 하기도 전에 약을 처방해 주는 의사였다. 그 약을 먹으면 뇌세포가 터지는 느낌이 들고 안구 신경이 끊어지는 느낌이 들며 눈물이 안 났다. 난 불면증에 시달렸고 눈이 심하게 아팠다. 그러나 사는 게 싫고 내가 부끄러워 신경정신과에 가는 것 말고는 거의 외출을 하지 않았다. 나중에 안 거였지만 각막염에 걸렸었으며 황반 변성 비슷하게 상처가 생기고 눈 안에 물주머니 같은 게 생겼고 아직 낫지 않아서 정기적으로 안과에 가 보고 있다.
정신병이 아닌데 정신과 약을 먹다 보니 정말로 환각이 보였다. 정말 안 되겠다 싶어 엄마에게만 나 이제 진짜 괜찮은데 하면서 약을 끊었다. 인터넷을 뒤져 봤는데 조현병은 약을 끊으면 안 된다고 했다. 난 조현병이 아닌데 하면서도 혹시라도 내가 또 미쳐서 가족 및 거리의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게 될까봐, 난 이제 정말 다 나은 것 같은데 하면서도 고민했다. 조현병 모임 등을 찾아 채팅도 해 보고 이런저런 글도 많이 읽었다. 난 조현병이 아니었다. 환청도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그건 그냥 내 생각들일 뿐이었으니까.
정신과 약을 끊으니 환각도 사라졌다. 마약 같은 거였나 보다 싶었다.
다시 일본에 가는 게 낫겠다 싶었다. 실은 고민했다. 어디로 가는 게 좋을까.
한국에서는 자신이 없었다. 일본에서의 생활이, 생활 수준만 놓고 보면 더 나았다. 한국에서 난 제대로 된 일자리를 가진 적이 별로 없었으니까. 망설여지는 이유는 일본에 가면 또 혼자라는 것, 가족들이 없어 외롭다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그 애가 같은 나라에 살지 않는다는 것.
그 애는 어차피 날 몰라. 그 애를 만날 일도, 내 평생 없을 거야. 그 애는, 내가 죽을 때까지 날 모를 거야.
너무 많이 좋아했는데.
예전에 좋아했던 그 오라버니는 나를 안다. 지금은 잊어 버렸을 수도 있지만, 예전에는 알았었다. 내가 엄청난 팬은 아니지만 사인회, 팬미팅 등 몇 번 만난 적이 있고 내가 그린 그림도 선물했고 같이 사진도 몇 번 찍었고.
그 애는 다르다. 내가 범접할 수 없는 위치에 있으니까. 공연을 보러 가는 것만 해도 어마어마한 경쟁률을 뚫어야 한다. 얼굴 보고 사인 받고 악수하고 같이 사진 찍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죽고 싶다는 생각도 버렸고, 그 애에 대한 상사병도 버렸다.
살아야 했다. 다시 살 길을 찾아야 했다.
정신병원에서 퇴원하고서 동생이 권하고 부모님이 그러라고 해서 독립하고 기초 생활 수급자 신청을 해 세 달간 기초 생활 수급자 생활을 했었다. 부끄러웠다. 일하고 싶다는 마음이 든 게 처음이었다. 난 정말 일하기 싫어했고 그래서 회사 때려치우고 아르바이트 하고 그랬었는데. 기초 생활 수급자가 되니 이걸 유지하려면 일을 열심히 해서는 안 되었다. 가능한 일들이 있긴 했으나. 그리고 신경정신과에도 계속 다녀야 했다. 가족들에게 이미 많은 걱정과 폐를 끼친 터라 더 이상 그러고 싶지 않아서 신경정신과에도 다니고 약도 먹고 기초 생활 수급도 받고 했지만, 두세 달 그렇게 지내다 보니 나는 내가 이렇게는 살아갈 수 없다는 걸 느꼈다.
신경정신과 약을 끊고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 오히려 몸도 좋아지고 정신도 맑아졌다. 안과에 갔더니 각막염이 심하고 눈 안에 물주머니가 생겼다고, 물주머니는 주사 치료를 하면 위험성이 있으니 더 나빠지면 다시 오라고 하셨다. 염증은 방콕 생활하며 몇 주인지 몇 달인지 고생했었는데 안약 넣으니 금방 나았다. 예전에 방광염 참다가 피까지 봤던 게 생각났다. 병원비 아까워서 한 달간 고생하다가 아파 죽을 것 같아 병원 갔었는데 별거 아니라는 식으로 말씀하시며 약 처방해 주셔서 약간 서운했었는데 약 먹으니 정말 순식간에 나아서 벙 쪘던 적이 있었다.
인터넷으로 일본 취업을 다시 알아보고, 모든 게 정해진 건 아니지만 어느 정도 윤곽이 잡힌 상태에서 구청에 갔다. 스트레스가 너무 심해서 치매 비슷하게 왔어서 그때는 정말 정신이 이상했지만 약 먹고 쉬고 하다 보니 나아서 이제 취업하려 한다고, 기초 생활 수급은 이제 안 받아도 될 것 같다고.
멀쩡한 사람이 부정 수급을 받았던 거 아니냐고 생각하시면 어쩌나 싶어 부끄러웠다. 그러나 난 정말 아팠고 돈도 정말 없었으니까.
구청에서 나와 햇살이 좋아 배회하고 있는데 구청 공무원 분들이 점심 시간이라 나와 걸어가고 계셨다. 인사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였다. 그냥 다 부끄러웠다.
너무 부끄러워서 이 이야기를 어디다 할 수도 없었다. 가족들에게만 얘기했다. 폐 끼쳐서 미안했고 챙겨 줘서 고마웠다고. 그런데, 기초 생활 수급은 정말 안 받고 싶었다고. 너무 부끄러웠다고. 나는 조현병이 아니라 상사병이었다고. 향수병에 상사병이 겹쳐서 그랬던 거라고. 너무 부끄럽지만 상사병이었다고.
그러나 여러 모로 부끄러웠기 때문에 내 힘으로 살아가야겠다고 단단히 마음 먹게 된 것 같다.
그렇기에, 부끄러움에도 감사하고, 후회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난 여전히, 널 많이 좋아한단다.
이제 부끄럽지 않아.
앞으로도 널 많이 많이 좋아할 거야.

ㅡ 2024년 10월 22일 남준이를 생각하다.

그 애 사진집을 보고 그린 그림
그 애의 인스타그램 스토리 캡처본. 많이 울고 있었던, 블로그에 울면서 글을 쓰고 있었던 때. 인스타그램 알림을 받고 그 애 인스타그램 스토리를 봤더니 내가 좋아하는 곡들, 그리고 그 순간의 내게 너무 와닿았던 노래들이 올라와 있었지. 그리고 난 점점 더 빠져들어 갔었지.
그 애의 인스타그램 캡처본. 같이 등산하다 바다가 보이는 휴게 공간에서 잠시 쉬며 컵라면 먹는 상상에 빠졌었지. 오늘 아침 사촌 언니가 내 남준이 팬 계정을 팔로우한 걸 기점으로 그 애 생각에 잠겨 글도 쓰고, 오랜만에 음악도 듣고 사진도 보고 그러다 그 애 폴더에서 발견한 캡처.



오늘 아침에 사촌 언니가 내가 작년에 만든 남준이 팬 계정을 팔로우하고 내가 쓴 시들에 좋아요를 누른 걸 보고서 내가 쓴 시들과 내가 그린 그림들을 다시 보다 그때의 기억들이 확 살아나 몸서리 치다, 네이버 블로그에 위 글을 썼다.
그러고서 오후 내내 그 애 사진을 보고 그 애 음악을 듣고 그랬다. 오랜만에...
그러다 티스토리에 들어가 봐야지 싶었는데 예전의 내 계정은 이미 없어졌지만 작년에 인스타 팬 계정 만들었을 때쯤 만든 계정은 있는데 그게 해외라서인지 인증이 안 된다며 로그인이 안 되더라.
전부터 그랬어서 예전에 쓰던 폰 하나로만 로그인이 가능한 상태였는데, 그냥 새로 하나 만들까 싶어서... 네이버 블로그도 있어서 사실 어차피 잘 안 쓰고 있긴 했지만 그래도 만들어 둘까 싶어서...
카톡으로 만들었다.
블로그 주소는... 이 아이디도 내가 한창 아팠을 때 만든 아이디이다. 정신을 잃었다 차렸다 할 때인데, 너무 아파서 정신을 잃었다가 깨서는 가족들에게 내가 이런 상태라는 걸 알리면 안 되고 혼자 조용히 죽어야 한다며 가족들을 전화번호도 다 차단하고 카톡도 탈퇴했다가, 그러다 또 어느 순간 카톡을 다시 만들었었다. 그때 만든 아이디이다. 그래서 이 모양...은 아니고 좀 많이 부끄러운데 그냥 당시 내 마음이 그랬기에 정신 차려 보니 아이디가 이거더라. 한 번 등록한 메일을 변경할 수는 없고 카톡을 또 탈퇴할 수는 없어서 그냥 쓰고 있는 아이디이다. 카톡 아이디는 아니고 메일 주소... ^^
블로그 아이디 추천에는 다른 랜덤 아이디가 떴는데, 그냥 카톡 메일과 같은 아이디로 했다.
예전에는 블로그 주소랑 메일이랑 다 같은 아이디였다. 네이버도 최근 다시 블로그 만들며 보니 다르게 하게끔 바뀌었던데.
난 그냥 옛날 감성으로~ 하면서...
티스토리 블로그 앱을 삼성 폰으로 해 보니 좋은 점은, 내가 폰에 설정한 글꼴로 써지네. 올리고 보니 글 작성할 때만이긴 한데.
아무튼. 뭐 그래요. 오늘은 하루 종일 그 아이 생각...
군생활 건강히 잘 하고 있기를.
난 이제 속이 시원해... 아마도. 어느 정도는.